다이어리/Y 이야기2013. 2. 4. 01:28

 

 

 

 <짜라짜짜, 추억을 먹다>

 

 

관람 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설날 연휴, 추석 연휴

관람료 : 성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전시기간 : 2012년 12월 22일 ~ 2013년 3월 31일

 

 

 

2월 2일 차이나타운을 생전 처음 구경갔다가 짜장면 박물관을 우연히 발견하고 구경하게 되었다. 다른 박물관 같은 전시관에서 촬영이 금지된 데 반해 짜장면 박물관은 포토존이 따로 있을 정도로 촬영을 장려했기에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짜장면 박물관은 청나라 청년 우희광이 건립한 공화춘이라는 1908~1980년대까지 명성이 자자하던 중국 음식점 건물을 인천광역시에서 매입하여 2012년부터 시작된 한국 최초의 짜장면 테마 박물관이다. 역사적인 중국 음식점 건물을 이용하여 짜장면 테마 전시를 하겠다는 의도가 참 참신한 것 같다.

 

관람 코스는 먼저 2층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화교 역사와 짜장면'의 주제로 전시가 시작된다. 이 곳에서 친절한 가이드 분의 설명으로 화교가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우리나라로 넘어와 사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이며, 공화춘이 청나라 제정에서 공화국으로 중국이 변화된 것을 기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 전시실은 '짜장면의 탄생'으로 개항기 인천항의 부두 풍경을 재현한 전시실이다.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을 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산동식 '짜장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모습이다. 산동식 짜장면은 삶은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먹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짜장면이라고 한다.

 

 

2 전시실은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실이다. 화교들이 즐기던 짜장면이 처음 공화춘의 메뉴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3 전시실은 '짜장면의 전성기'인 1970년대 중국 음식점을 재현한 전시실로, 해방 이후 춘장에 캐러멜이 추가되어 달콤한 맛을 내게 되면서 짜장면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웬지 이 장면은 학교 졸업식 때면 어김없이 먹던 짜장면을 재현한 듯하다.

 

 

4 전시실은 '현대의 문화아이콘 짜장면'으로 현대에도 즐겨찾는 짜장면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을 모두 관람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면 가장 처음 반기는 건 짜장면을 만드는 과정이다. 1960년대 공화춘의 주방의 모습을 재현했다.

 

 

1층의 아카이브 전시관으로 가면 철가방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표되는 중국 음식을 최대한 신속하게 배달하기 위해 시작된 철가방의 역사는 나무, 플라스틱, 알루미늄, 함석판 등을 거쳐 오늘날의 철가방으로 발전되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명품을 선정했는데 모나미 볼펜, 신라면, 칠성 사이다, 포니 자동차, 시발 택시와 함께 철가방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짜장면을 쉽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과 레토르트 식품인 즉석 짜장이나 봉지 짜장, 용기 짜장 등이 있는데 종류별 연대별로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짜장라면은 짜장과 라면을 혼합한 음식으로 1970년 삼양의 '삼양짜장면'이 최초이고 가격은 25원이었다. 1973년 농심에서 '소고기짜장면'이 출시되면서 짜장라면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말에 농심에서 '짜파게티'가 출시되면서 1990년대 삼양의 '짜짜로니'가 출시될때까지 이렇다할 경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연대별 짜장라면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상표의 짜장라면을 많이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그 외에도 일본 라면과 우리 나라 라면의 비교와 미옌장의 역사, 짜장면 용기의 역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즐겁게 관람할 수 있으며, 몰랐던 짜장면의 역사도 덤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3월까지만 전시한다고 하니 차이나타운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관람하면 좋을 듯하다.

 

 

 

 

 

 
 
 
 
Posted by Y&S
다이어리/Y 이야기2013. 1. 27. 00:40

 

 

 

에스테틱을 우리 나라 말로 옮겨보면? 피부관리실, 피부관리샵 정도가 될 것이다.

30대 후반까지 살면서 피부과나 피부관리실, 성형외과 등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피부 관리 세계(?) 왕초보의 에스테틱 경험기를 한 번 써보려고 한다.

 

배경 설명을 먼저 하기 위해 내 피부 변천사를 간단히 말해보겠다.

난 29살까지 얼굴에 스킨과 로션 외에 그 어떤 것도 발라본 적이 없다. 피부가 약간 지성이어서 그 정도만 발라도 피부가 당기는 등의 건조함을 느낄 수가 없었고, 피부에 잡티가 없어서 필요성을 못 느끼기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지간히 꾸밀 줄 모르고 외모에 관심이 없어서였던 듯 싶다. 30살 이후에는 살짝 기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시세이도의 브라이트닝 라인을 기초 화장으로 하고 비비와 썬크림까지 바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파운데이션이나 색조 화장은 할 줄 몰라 포기하는 심정으로 현재까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다시 말하자면 나는 화장을 할 줄 몰라서 기초 라인만 고수한 것이지 피부를 보호하고자 하는 맘에 그랬던 건 아니라는 거다.

 

화장을 30살까지 안한 여자가 말하는 화장을 안하는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말해보자면 장점은 색조화장 등의 화학성분으로 피로함을 주지 않아 의외로 30대 중반까지 깨끗한 피부란 소리를 들었고, 단점은 아이크림이나 기초 화장 라인 등의 기능성 화장품을 바르지 않아 빨리 피부에 노화가 찾아와 잔주름이 좀 빨리 생겼다는 점이다. 뭐 나의 경우에 한정된 결론이니 화장을 하는 것이 좋다 싫다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이른 듯싶다.

 

이렇게 피부에 신경을 끄고 살던 내가 에스테틱을 찾은 이유를 말해보겠다.

재작년인 2011년에는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시간에 여유가 많았고, 자전거 도로가 잠실까지 이어져 있는 탄천이 가까워서 자전거를 운동 삼아 3시간 이상을 타고 타녔었다. 자전거를 탈 때 피부에 관심없는 사람답게 모자 하나 달랑 쓴게 피부 보호의 전부였다. 그걸 몇 개월을 계속했더니 그 여파가 작년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미가 눈 밑에 눈에 띄게 생기기 시작했고, 검버섯 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비비를 발라도 없어지지 않는 잡티에, 성인 여드름까지 가세하여 피부에 관심 없는 나조차도 신경이 쓰이고 속상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그 모양이니 이쁜 옷을 입어도, 헤어에 돈을 쳐발라 변화를 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 기초 지식이 없는 관계로 주위에 이럴땐 어떤게 가장 빠르고 효과가 좋은 방법인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홈케어의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피부과를 추천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며, 피부관리실을 추천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 홈케어로 피부에 자극이 적다는 알로에 팩을 사서 발라보다가 성인 여드름이 폭발할 지경까지 이르자 돈을 좀 쓰자고 마음 먹고 집에서 가까운 피부관리실을 찾아보았다.

 

일단 인터넷으로 제일 가까운 곳으로 알아본 곳이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수 피부관리실'이었다. 간단히 사람들 평을 보면서 '오래되었구나', '평이 좋네?'라는 두 가지를 느끼고 바로 상담 예약 후 상담에 들어갔다. 아는 것이 없으니 별걸 다 물어보다가 원장님 말씀 중에서 '피부에 인조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닌 건강하게 만드는게 피부관리실의 목적'이라고 하신 말씀에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라는 내 평소 신념(이라고 쓰고 귀차니즘이라고 읽는다)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게 되어 그 자리에서 바로 등록해버렸다. 여기 저기 다녀보고, 이런 저런 코스도 경험해보고, 한 회만 등록해서 내 피부에 맞는지 알아보고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귀찮아서 못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제일 무난하다는 'Vital 관리'를 등록했다. 비타민 관리는 10회에 50만원이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피부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작할 땐 왠지 겁이 났다. 원장님은 단계별로 효과에 대해서 설명과 함께 관리를 시작하셨다. 물론 설명을 듣고 관리가 끝나면 대부분 까먹긴 했지만 말이다.

 

클린징 -> 초음파를 이용한 딥 클린징 -> 이온영동법 전극을 이용한 1차 비타민 침투 -> PH 포렐 (독일) 스크라이버 2차 침투 -> 데콜테 (가슴), 팔, 얼굴 마사지 -> 2차 팩

 

이 과정은 오늘 피부 관리 후 받고 있는 과정을 종이에 써달라고 부탁드려서 받아온 것이다. 이 과정 자체는 피부관리실마다 달라지며 또 피부관리사의 스타일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다.

 

항상 피부 관리받는 공간

 

피부 관리를 계속 받아오면서 느낀 것은 원장님은 자기 소신이 분명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피부 관리실이 고객의 기분을 우선으로 하는 곳이라 원하는 대로 해주는 곳이 많은데 원장님은 피부 상태를 보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게 우선이고, 피부가 우선이기 때문에 원칙을 어기는 법이 없으시다. 여드름이 있는 경우나 여드름 압출이 있을 경우에는 얼굴 마사지를 안하시고, 필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비타민 관리 대신 필링 관리를 해주신다. 물론 여드름 압출이 너무 아파 요새는 원장님이 아무리 하자고 하셔도 안하는 내공이 생겼달까(근데 이건 비밀인데..ㅠ)

 

 

태닝실

 

그 뒤로 꾸준히 피부 관리를 받은 후에 피부에 잡티가 없어지고, 기미가 옅어지고, 피부가 진정되어 성인 여드름도 거의 안난다. 그렇지만 나이도 있고 더 나아지고픈 마음에 꾸준히 받는 중이다.

 

오늘 피부관리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피부관리실에는 원래 건강한 피부를 가지신 분들이 건강한 피부의 유지를 위해 다니시는 경우보다 심각한 피부의 트러블이나 문제 때문에 오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마치 나의 경우처럼..그래서 좋아진 분들의 입소문으로 10년 넘게 피부관리실 홍보나 마케팅 없이도 유지해오고 계신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인게 나도 피부 관리를 받으면서 주변에 홍보를 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개인실

 

오늘 개인실의 용도를 물어보면서 놀랐던게 남자분들도 꽤 피부관리실을 다닌다는 사실이다. 남자 고객은 여자 고객과 다른 개인 공간에서 피부 관리를 받고, 전신 관리를 받는 여자 고객들도 개인 공간을 이용하신다고 한다. 반 년 이상 피부관리실을 다니면서 이걸 몰랐다니 ㅠ

 

기본적인 바이탈 관리 외에도 다른 관리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작년 11~12월 두 달간 거의 매일 술을 마실 일이 생겨 피부가 다시 엉망이 되기 시작했을 때 원장님이 추천하신 건 벨벳 관리였다. 독일 수입품인 벨벳은 주 성분이 콜라겐과 동물(양 등)의 태반이며 많이 상한 피부를 빠르게 회복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비타민 관리보다 2만원 더 비싸다. 벨벳 관리 후 2주 정도 지나니까 피부가 눈에 띄게 생기가 돌고 좋아져 그 후에 또 한번 받았다는..나 같은 피부 관리의 초보자에게는 신세계였달까..

 

뭐 아무렇게나 대충 고른 피부관리실이 이렇게 좋은 곳이라는 건 나에겐 행운이랄밖에 없겠다.

 

 

 

 

 

 
 
 
 
Posted by Y&S
다이어리/Y 이야기2012. 12. 25. 16:38

 

 

 

크리스마스 이브 밤 11:30 ..

남친과 함께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에서 하는 신승훈 콘서트에 다녀왔다...우후후...

 

경기장 앞에 가보니 오른쪽 경기장에서는 김연우 콘서트가, 맞은편 경기장에서는 김범수, 박정현의 그해 겨울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연우, 김범수, 박정현이라니..그 사이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물론 다른 경기장에서도 다른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겠지만 나는 가수다 1시즌 초반에 광팬이었던 나는 그 세사람의 이름만 봐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 세사람의 콘서트는 나중에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신승훈 콘서트에 왔으니 발길을 돌려 들어갈수밖에..

 

핸드볼 경기장은 생각보다 작았고, 이층 뒷자리였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주위에는 관광버스로 단체로 온 일본인 팬들도 많았는데, 괜히 내가 다 고마운 맘이 들었다. 일본팬들은 팬심을 행동으로 제대로 보여주는 거 같았는데 역시나 대단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불구하고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남의 나라까지 와주다니 말이다.

 

 

 The 신승훈 SHOW POP TOUR

 

 

중학교 시절 김건모가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하고, 신승훈이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했다. 김건모와 신승훈 모두를 사랑했다. ㅎㅎ 워낙 팬질은 안하는 성격이라 딱히 뭔가를 한 건 없지만..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가보는 신승훈의 콘서트였지만, 두 가수에 대한 애정만은 항상 있었다. 아마 남친이 먼저 예매를 하지 않았다면 '신승훈 콘서트 가고 싶다' 했던 내 말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남친에게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고 마냥 신나서 콘서트의 시작을 기다렸다. 콘서트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많이 멀어져버린 옛 추억과 옛 팬심을 점점 찾으면서 한번도 연예인에게 해본적 없었던 '오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 앞에는 제법 골수팬인듯한 여성분이 콘서트를 찾은 팬은 이래야 한다는 정석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남눈을 너무 의식해버리는 나이가 되버린 탓에 크게 '오빠~~'라고 부르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빗장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어느 정도 풀린거 같았다. 그래서 조명이 어두워졌을 때는 정말 원없이 크게 노래부르고 크게 뛰고, 크게 열광했다.

 

내용은 알차기 그지없었다. 오직 신승훈 한 사람으로만 이끌고 가면서도 식상하다거나하는 맘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신승훈표 재치있고, 진솔한 입담도 콘서트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훈훈하게 이끌었다. 때로는 향수를 자극하고, 때로는 미친듯이 뛰게 하고, 때로는 잠자고 있던 감수성을 자극해주는 신승훈은 역시 신승훈이었다. 신승훈 콘서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이상을 보여주어 너무 감사했던 콘서트이다.

 

 

콘서트 내내 미친 듯이 흔들었던 야광봉

 

콘서트 표

 

 

콘서트를 보는 내내 남친은 약간 부끄러워하고 난 발광했지만, 뭐 어떠랴..나도 그때만은 십대였던 것을.....

 

 

 

 

 

 
 
 
 
Posted by Y&S
다이어리/Y 이야기2012. 12. 18. 21:54

 

 

 

월남전은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베트남과 미국의 원조를 받은 남베트남이 치른 전쟁으로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베트남 전쟁을 말한다. 1973년 1월에 있은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고, 1975년 사이공이 합락되어 남베트남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실질적으로 미국이 전쟁에서 진 유일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55만 3천 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5만 8천 명이 사망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군은 73년 완전 철수할 때까지 연 31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고, 이 과정에서 전사자 5000여명, 부상자 2만여명이라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64년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이 파견됐으며, 1973년 휴전협정 조인 때까지 전쟁에 참여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백마부대에 소속되어 월남전에 참전하셨다. 아버지는 직접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통신병으로 지원하셨고, 총 한번 제대로 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두 명을 죽여본 경험이 있다고 하셨지만,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단지, 한국군은 전투에서 전우가 쓰러지면 눈빛이 변하면서 공포의 부대로 변했고, 베트콩들은 그래서 한국군이 무서워 피해다니곤 했다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버지가 해주신 얘기는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어머니 몰래(?) 말씀하시던 월남 처녀들과의 펜팔 이야기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는 담배피는 아이들 이야기가 인상깊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ㅋㅋ

 

할아버지와 손자,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담배를 자연스럽게 피는 모습은 분명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이야기지만, 그 당시 베트남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베트남 아가씨들이 특별히 한국 여자들보다 이쁜건 아니겠지만 하얀 아오자이를 입으면 몸매가 잘 드러나 당시 총각이자 군인이었던 아버지한테는 천상의 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ㅎㅎ

 

 

 

그 당시의 평범한 베트남 여자들이 일하는 모습이다.

 

 

 

 

아버지의 부대에 위문 공연을 왔던 이미자 사진이다.(왼쪽은 송해, 오른쪽은 전국노래자랑에서 합격, 불합격을 결정하는 딩동댕 아저씨가 아닐까?)

 

 

 

예전에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에 가서 본 영화 '킬링필드'도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였다. 보는 내내 어린 맘에 광활한 평야에 하얀 해골이 가득했던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다시 볼 기회는 없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많은 살육, 인간성이 말살되는 과정, 부모자식도 갈라놓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 등이 잘 표현된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그 후에도 여러 개의 베트남 전쟁 배경 영화를 보았지만 어린 날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 보았던 '킬링필드'만큼 인상깊은 영화는 없었다.

  

 

킬링필드(kililing pield)란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권 때 크메르군에 의하여 수 천 명이 학살되어 매장된 곳을 말하는 것으로 죽음의 땅이란 뜻이다.

 

 

 

 

 

 
 
 
 
Posted by 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