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카카오페이지에서 제목만 봐도 알만한 추억속의 만화들을 하나 둘 연재한다.
반가움을 느끼며 보려했다가, 작은 모바일 스크린에 불편함을 느껴 되돌아 나오면서, 역시 예전형식의 만화들은 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지금의 만화는 웹과 모바일에 최적화되어 예전보다 훨씬 심플하면서, 쎄련되고, 보기 편해졌지만,
20년 전 종이로 된 만화책을 빌려, 구석구석 엑스트라가 혼자 중얼거리는 작가의 깨알같은 작은 손글씨까지 읽으며 즐거움을 느꼈던 나에겐, 지금 이러한 시대적 변화들이 조금 안타깝기도 하다.
그리고 나역시 언제부턴가 쭉 나열된 컬러 스크린만화가 익숙해졌다.
예전처럼 칸을 나누어 연출하고, 한땀한땀 펜선으로 효과를 내고, 흑백의 톤을 사용해 만들어진 종이책의 만화들이 오히려 보기 어색해진 지금은, 이렇게 세상과 내가 함께 변해간다는걸 문득 깨닫게 한다.
뭐 그건 그거고, 옛날 추억의 만화 타무라유미의 '바사라'가 얼마전에 카카오페이지에 올라온 걸 보고 반가움과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순정만화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던 나에게 기억에 남을만한 순정만화는 몇 안되는데, 그 중 다섯 손가락안에 꼽을만큼 인상적이게 봤던 만화가 바로 '바사라'이다.
보통 두 남녀주인공이 한번 만나면, 우연이든 뭐든 하루가 멀다하고 부딪히면서 애정을 쌓아가는 여타순정만화들과 다르게 이건 남녀 주인공이 한번 만나는걸 보려면 아주 애간장이 다 탄다.
이게 과연 순정만화인가 싶을정도로 총27권의 장편만화에서 둘이 만나 같이 보낸시간을 다합치면 한 세네권쯤 되려나?;;
이 둘이 다음엔 대체 언제만나는지 기대하면서 보는게 이 만화의 최고묘미인데, 너무도 안나와서 이미 몇 권이 훌쩍 지나있기도 한다;;
보통 이정도면 남녀사이의 빠른진행을 기대하는 사람들한테는 지루해질 법도 하다.
하지만 두 주인공이 각자 많은 사건을 겪고,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들에 어느새 빠져든다.
그 와중에 마른우물의 단비처럼 가끔씩 펼쳐지는 둘의 접점과 러브모드는 독자의 감성을 충분히 충족시켜준달까.
난 조금은 뻔하디 뻔할 수 있는 클리셰의 로맨스를, 세계관과 엮어 특별한 스토리로 이끌어가는 작가의 능력에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사실 주인공 둘이 각 지역을 돌며 사건을 벌이는 와중, 항상 아슬아슬하게 어긋나 서로의 정체를 모른채, 매번 절묘하게 만났다 헤어지는 설정이 약간 부자연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작가의 탄탄한 스토리 진행과 연출, 그리고 클라이막스를 위해 이 부분 정도는 애교로 봐주자.
특히 이 작가는 인간적이면서도 세심한 묘사, 그리고 감성을 묘하게 자극시키는 감정표현 능력이 정말 뛰어난데,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알게되는 절정을 지나 후반부로 치닫는 부분은 지금봐도 울컥하게 만든다. (소녀감성이 충만했던 어릴때는 정말 펑펑 울었다.)
사실 너무도 유명한 만화라 이 글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봤을테지만 그래도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여기서 잠깐 대략적인 바사라의 스토리를 소개하겠다. (스포주의)
배경은 네 명의 왕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일본.
그 중 적왕이 다스리는 한 마을에 이 세상을 바꿀 운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운명의 아이 '타타라'와 그 쌍둥이 여동생으로 태어난 사라사.
세월이 지난 어느날, 이 소식을 들은 적왕의 군대가 마을에 쳐들어와 역모를 꾸민다는 명목으로 운명의 소년 타다라의 목을 베고, 마을을 불태운다.
사라사는 비탄에 빠진 마을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자신이 대신 타타라가 되기로 결심하고, 마을과 오빠의 원수인 적왕에게 맞서 싸우기 위한 원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타타라가 사라사의 모습일 때, 운명처럼 만나는 한 남자.
그 남자는 바로 사라사의 원수인 적왕 '슈리'였다.
손속이 잔인하지만,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 통치하기 위한 자신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슈리.
마을과 가족의 원수를 갚기위해 시작했지만, 폭군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라사.
둘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사건에 부딪치고, 사람을 만나고, 또 잃기도 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둘은 운명처럼 끊임없이 만나며 사랑을 키워나가고,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가 된다.
서로가 너무도 힘들 때 만나 사랑을 나눈 마지막 밤이 지나고...
슈리와 사라사가 서로 죽이기 위한 전쟁터의 한 가운데서 만나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은 기어코 찾아온다.
정말 지금봐도 대단한 명장면이다.
과연 이 둘은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살짝 귀띔하자면 둘이 서로를 알게되는 이 장면이 15권이니까 아직도 뒤에 10권이나 스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스토리가 워낙 방대해 슈리와 사라사 위주로만 넣었지만, 사실 바사라라는 거대한 작품속에서 이는 빙산의 일각일뿐이다.
특히 바사라는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다.
작품속에서 무수히 많은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출현하여, 한명한명 주인공 주위로 몰려드는데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캐릭터들을 자연스럽게 융화시켜 한명도 소홀함 없이 끌고나가는지 참 대단한 것 같다.
특히 이중성을 가진 슈리같은 경우는 자칫 잘못하면 캐릭터 붕괴가 일어날법도 한데, 캐릭터 성장이라는 틀로 심적변화를 정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했다.
사실 연재 속도를 따라가며 볼 당시에는 캐릭터가 워낙 많으니까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갑툭튀 캐릭터에 '얘가 누구더라?' 했는데, 전권을 한꺼번에 다시 읽으니 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가 생각하기에, 캐릭터에게 감정을 불어넣어 세심한 부분까지 모두 챙기는 놀라울정도의 디테일함이, 이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한다.
진지한 스토리 안에서 가끔씩 던져지는 그들의 깨알같은 대사들과 개그코드가 나랑 상당히 맞기도 하고...
여하튼 '바사라'는 사건 진행속도도 지루하지 않게 빠른편이고, 나이가 든 지금 다시봐도 충분히 재미있는 매력가득한 만화다.
그리고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꼭 추천하고 싶은 '세븐시즈'가 있는데,
너무 길어져서 세븐시즈는 다음글로 넘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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