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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5 6.25 전쟁의 발발연도는 1950년입니다 by Y 6
다이어리/Y 이야기2013. 6. 25. 17:26

 

 

 

6·25 한국전쟁 당시 끝없는 피난 행렬

 

 

성인의 36%, 중고생의 53%가 6.25 발발연도를 모른다는 충격적인 뉴스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뉴스의 댓글에서 6.25가 북침이니 남침이니 싸우는 댓글도 보고 또 충격을 받았다.

(손가락으로 똥구멍을 찔렀다고 해서, 손가락침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 행동을 똥침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6.25 전쟁이 왜 남침인지 유추해보자)

 

얼마전 진짜 사나이에서 샘 해밍턴이 6.25 발발연도를 몰라서 틀린 대답을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한국인이 아니니 이해가 됐었다. 그 얼마전엔 무한도전에서 요즘 학생들이 3.1절을 '삼쩜일절'이라고 읽는다는 말이 나왔을때도 조금 충격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의 충격은 아니였었다.

 

한국인이라면 아픈 한국의 역사 즉, 우리나라의 역사 6.25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보면서 본인이 6.25 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복기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만약 본인이 6.25 발발연도를 몰랐다면 이 글을 읽으면서 발발연도와 더불어 6.25 전쟁의 많은 것을 알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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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부터 6.25 전쟁 전까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좌), 김구 선생과 김일성(우)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35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독립을 이룬 날이었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군사경계선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되면서 또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1947년 유엔총회는 남북한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려 하지만,

소련이 총선거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면서 남한에서만 선거가 행해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대 대통령으로는 미국의 지지를 받은 이승만이 선출된다.

이어서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역시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주석으로 선출된다.

 

유엔에서는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하고 합법한 정부로 인정했지만, 이에 질세라 소련 등 여러 공산국가들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한다.

이로써 단순한 군사경계선이었던 38선이 두 나라의 국경선과 마찬가지가 되고 한반도는 분단국가가 된다.

 

이후로 사실상 남한과 북한 모두 통일을 구상했다.

이승만도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호언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힘은 너무나 차이가 났다.

이승만 정권은 그 지지기반이 약해 정치적으로 안정을 꾀할 수 없었고,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되었으며, 민중과 군부의 저항이 심한 상황이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든든한 원조를 받으며 남로당의 당수 박헌영을 밀어내고 1인 독재의 안정을 꾀하고 있었다.

 

 

6.25 전쟁 발발 배경

 

북한이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가 필수였다. 이에 북한은 공화국이 설립되자마자 소련과 미국의 군사 철수를 요구한다. 어짜피 소련은 북한과 인접해있으므로 군사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라도 군사를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한반도와 지리학적으로 너무나 먼 미국의 군사 철수가 목적이었다.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 차이를 보자면 6.25 전쟁 전 북한은 38선에 10개 사단의 13만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10만명의 예비군을 조직한 반면, 남한은 8개 사단의 10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나마도 4개 사단은 공산게릴라 소탕으로 멀리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예비군 또한 없었다. 게다가 남한은 장비에서도 북한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미국이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 라인(Acheson,D.G. Line)을 발표하게 된다.

 

결국, 남한 내부의 정치/경제 혼란, 현격한 군사력의 차이, 남한에서의 미군 완전 철수, 중국의 공산화(1949년), 애치슨 라인 발표 등이 김일성에게 무력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스탈린에게 남한의 무력 침공에 대한 승인을 받아내고 중국의 마오 쩌둥의 동의까지 얻어내면서 남침의 준비는 사실상 끝이 나게 된다.

이에 중국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부대를 북한으로 귀국시키고, 전쟁시 보급품 공급을 약속한다.

 

 

6.25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6.25 전쟁의 전개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시작하면서 6.25 전쟁이 시작된다.

이미 철저히 준비한 전쟁인데다가 군사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북한이 서울 미아리까지 진격하자 남한은 북한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그 당시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직 피신하지 못했던 서울의 많은 사람들이 예고 없는 다리 폭파로 인해 생명을 잃었고, 다리 위에 있던 수백명의 피난객 또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은 3개월만에 한반도의 끝인 부산, 대구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950년 6월 27일 개최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남침을 전쟁범죄로 규정짓고 유엔군을 파병할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때 북한으로서는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남침을 지지해주었던 소련이 이사회에 불참함으로서 만장일치로 유엔군 파병이 결정된다.

만약 소련이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 파병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의 불참은 대만의 상임 이사국 결정을 항의하기 위함이었지만, 일부러 유엔군 파병을 묵과하여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싸우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미국과 기타 16개국에서 파병된 유엔군이 조직되고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이끌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

 

 

서울 탈환 후 영사관에 성조기를 올리고 있는 미해군장교

 

 

1950년 8월 4일 계속 남으로 진격하던 북한인민군이 그 진격을 멈춘 곳이 바로 유엔군과 국군이 함께 방어진지를 구축한 낙동강이었다. 이때 유엔군이 항공기로 네이팜탄을 북한 진지에 집중적으로 퍼부어 불바다를 만들자 쓰러지는 북한군이 한둘이 아니였다. 이 모습을 보고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이 퍼지게 되어 북한군을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이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인민군이 남한 아래쪽까지 깊숙히 전진한 상황에서 그 허리를 끊어 적의 후방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으로 그 성과가 탁월하여 유명한 작전이다.

 

 

평양으로 진격한 한국군

 

 

1950년 10월 26일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그대로 38선을 넘어 북한의 압록강까지 북으로북으로 진격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의 국경선 코앞까지 진격한 유엔군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다시 전세는 역전되고 한국군은 오산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이때 중공군은 장비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수의 병력에 의존하는 '인해전술'을 이용하여 공격하는데 이때 중공군이 나타나면 땅이 안보였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가 많은 중국답다.

 

1951년 3월 24일 전세가 다시 역전되어 한국군이 38선을 넘게 된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대만의 장개석과 손을 잡고 만주를 공격하자는 주장을 펴고, 이에 세계 전쟁으로의 확대를 걱정한 미국정부에 의해 맥아더 장군은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중공군이 4월과 5월 '춘계대공세'를 펼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한국군이 철원까지 진격하자 소련은 1951년 6월 23일 바로 휴전제의를 하게 된다. 미국이 제의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8일 시작된 휴전 회담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때까지 무려 25개월이나 걸렸다. 주요 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 교환 등이었는데, 휴전 협정이 조인될까지 전선에서는 휴전 전에 조금이라도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결국 최종 전선이 휴전선이 되어 남북이 휴전하게 된다.

 

 

6.25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난 후 남북을 모두 합쳐 사망자 150만명, 부상자 360만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으며,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화되었다. 이산 가족 또한 1천만명에 이르르며, 전쟁은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만들었다.

남북의 적대감은 전쟁으로 인해 극대화되어 남한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법보다 위에 있게 되었고, 북한은 대대적으로 반동 분자를 색출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냉전이 격화되었다.

반면에 일본에게 6·25 한국 전쟁은 앞서 패한 만주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가 고도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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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장난으로 치부해서도, 일어나길 기대해서도 안된다.

6.25 한국전쟁과 같은 동족끼리의 전쟁은 더더욱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다.

 

글을 쓰자 마음먹고 무려 이틀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찾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진 속의 아이도, 어른도, 군인도 모두 그 비극적인 전쟁상황이 현실이었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게다가 그 당시 우리 아버지도 피난을 가셨고, 우리 할머니도 피난을 가셨으니, 그들은 남이 아닌 우리의 가족인 것이다. 가족을 전쟁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목격하는건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다.

 

아무래도 오늘이 살면서 가장 마음이 아프고, 많은 것을 느낀 6월 25일이었던 듯싶다.

 

 

 

 

 
 
 
 

 

Posted by Y&S